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25절 말씀을 통해 "십자가 복음만을 자랑하는 교회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교회 내의 분열과 분쟁의 문제를 앓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어 온전히 합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고전 1:10)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품어 하나 됨을 이루는 온전한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 복음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사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고 회복한다면 교회 내의 분쟁은 사치요, 낭비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답답하고 풀리지 않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쁨이 상실되고 초조합니까?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절에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먼저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최악의 처형 도구요 방법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저주를 상징하고 십자가는 패배를 상징하고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십자가 위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라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모두 납득하지 못할 내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지성과 지혜를 추구하였던 헬라인들에게 있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십자가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 되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특히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22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현상’이었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표적 증거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눈으로 본다고 다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구약 출애굽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까? 그런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쉽게 부인하고 부정합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너무 많아서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 (요 21장 25절) 말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표적을 봐야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표적을 봐도 믿지 못하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표적’이라면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 였습니다. 이들은 이성적 판단으로 합리적인, 논리적으로 이해가 돼야 동의가 되고 납득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21절에도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이해되는 책이 아닙니다.
복음을 깊이 깨달으면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까?
18절에 보시면, 구원을 받는 우리들... 또 24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18절과 24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아는 것은 우리의 ‘체험’이나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불러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적 지혜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자랑할 것은 십자가 복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깊이 깨달으면 교회 내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앞세우거나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알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로 그 복음의 능력을 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시작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패배를 승리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성도는 오직 십자가 복음 밖에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주님의 것을 불러 주시고 나로 복음을 알게 하시며 그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자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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