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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욥기

욥기 9장 24절~35절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by Updream 2024. 10. 27.

매일 큐티 욥기 9장 24절에서 35절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욥기 9장 24절~35절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욥기 9장 24절~35절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살다 보면 참 억울한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계신 집사님이 이단으로 오해를 받았는데,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릅니다.

 

조선시대에는 힘없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대궐 밖에 북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 북을 가리켜서 신문고라고 불렀습니다.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은 이 북을 힘껏 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제도가 있다는 사실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다면 얼마나 힘들고 답답할까요?

 

오늘 말씀의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욥기 9:24 /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재판관이 그 악인을 심판해야 하는데 재판관의 얼굴도 사라졌습니다. 악을 심판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자가 사라진 것입니다.

욥기 9:25 /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욥기 9:26 /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욥은 세월의 빠름을 대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가 세월의 빠름을 탄식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그의 생명이 죽음의 문턱으로 향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건대 아마도 욥은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그리고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할 수 없음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욥기 9:27 /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욥기 9:28 /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기 9:29 /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욥기 9:30 /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욥기 9:31 /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재판장으로 계시지 않음에 대한 불평을 토로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 없는 자로 인정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어차피 나를 죄 있는 자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30절에,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눈 녹은 물은 당시에 사람들이 가장 깨끗한 물이라고 여겼던 물입니다. 그리고 잿물은 비누와 같은 용도로 쓰인 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눈 눅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한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멀리하고 힘썼던 인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죄인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욥은 계속 말합니다.

욥기 9:32 /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욥기 9:33 /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재가 없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이 답답함과 억울함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보자가 계십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 인간의 제한된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분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욥이 인식한 하나님도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하시는 분, 저 멀리 계시는 분!! 감히 다가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에는 무관심하시고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시거나, 우리 인생에 무관심하시다거나 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소통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5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중보로 번역된 단어는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보자란 조정해 주는 사람, 중재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26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 우리의 인생에 무관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삶을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의지하여 언제든지 어디서나 기도의 신문고를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삶을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의 신문고를 울려서, 어떠한 문제와 답답함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하며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