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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욥기

욥기 11장 1절~20절 (나아마 사람 소발)

by Updream 2024. 10. 29.

매일 큐티 욥기 11장 1절~20절 말씀을 통해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욥기 11장 1절~20절 (나아마 사람 소발)
욥기 11장 1절~20절 (나아마 사람 소발)

 

 

나아마 사람 소발

오늘 말씀은 욥의 친구인 나아마 사람 소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발은 지금까지 다른 두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이 욥에게 해 준 이야기와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은 인과응보의 원리로 욥의 고통을 설명했습니다.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욥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였고, 더 나아가 자신의 무죄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고 계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아마 사람 소발이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욥기 11:1 /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기 11:2 /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소발의 첫 번째 충고는 이것입니다. “욥 자네 말이 너무 많군!!”

 

말 많은 사람치고 온전한 사람 없고, 그 입을 좀 다물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발의 이런 충고가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 곳곳에 이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0:19 /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전도서 5:2 /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을 비교하면서, 그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많은 말은 쓸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를 읽어 보면, 욥이 점점 더 쓸 때 없는 말,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 많은 욥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친구들입니다.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너는 죄인이야라고 단정 지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친구들의 말 때문에 욥은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많을 했던 것입니다. 

 

 

네가 어찌 알겠느냐

욥기 11:4 /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소발은 고난이라는 확실한 증거 앞에서, 이를 부인하고 하나님에 탄식을 쏟아 놓는 욥의 말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말이 참 많구나!! 자네가 의롭다고 그래 한번 볼까?”라는 것입니다.

욥기 11:5 /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욥기 11:6 /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소발은 욥의 불경스러운 주장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직접 답변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욥이 살아 있는 것은 그나마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다 묻지 않으시고, 욥이 저지른 죄악보다 가볍게 처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욥기 11:7 /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욥기 11:8 /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욥기 11:9 /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7절과 8절에서 계속 강조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어찌 알겠느냐”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시고, 스올보다 깊으시며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신 분이신데 어찌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한 욥 자네가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알지만 자네는 모르고 있군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주장은 사실이기도 하고 이미 욥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주에 비하면 티끌보다 더 작디작은 내가 이해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제한적인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소발은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욥기 11:10 /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쏘냐
욥기 11:11 /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소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틀린 이야기가 하나 없습니다. 구구절절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가 말한 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한적인데 소발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욥에게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발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욥을 훈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 기도

어느 성도님이 풀리지 않는 답답한 문제를 들고 한 목사님에게 찾아가 묻습니다.

 

“목사님 왜 나에게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나를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목사님이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도하시죠..”

 

‘기도하시죠’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니, 기도하시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니 기도하시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기도하시죠.”

 

무책임한 말 같지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기도하시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합니다. 지금은 침묵하시지만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우리는 기도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하루 속에 기도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우리 삶에 나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험하는 믿음의 복된 하루 보내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