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2장 1절에서 11절 말씀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함
바울은 전장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으나 왜 계획이 변경되었는지 오해를 풀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계획이 변경되었으며 또 고린도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는 당장의 방문은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2:1 /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고린도후서 2:2 /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1절에서 ‘근심 중’에 라는 말은 바울의 방문으로 교회가 더욱 어렵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방문이 왜 교회의 어려움을 만들게 될까요?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의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교회 방문은 반대파와의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고 교회의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담임목사와 반대파 간의 갈등이 초래되어 교회가 분열하고 또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이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방문은 교회의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 공동체의 근심을 주기 때문에 이런 방문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고린도후서 2:5 /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2:6 /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5절에서 근심하게 한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바울의 사역을 시기하고 바울의 사도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의 행동은 결국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회 전체의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적자들의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바울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5절에서 “근심하게 한 자가 있어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요 아니요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근심하게 만드는 자들은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힙니다.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그런데 그렇게 근심하게 한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놀랄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2:7 /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6절에서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한 바울은 7절에서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를 용서하고(카리사스다이)는 본래 ‘선물을 준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을 지닌 ‘카리조마이’의 부정사입니다. 명사형으로 쓰면 카리스(χάρις)인데 카리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편에서의 호의와 사랑을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교회를 힘들게 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도 용서의 기회를 주고 다시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2:8 /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교회의 근심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 교회 공동체 대한 권면은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바울을 무시하고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은 사실 상대하기 싫고 교회 공동체에서 쫓아내고 싶은 대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를 대적하고 모함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모함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사실 상대하기도 싫고 교회 공동체에서 그들이 나갔으면 하는 마음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랑을 그들에게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법입니다.
세상은 원수를 배로 갚아 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복수입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면 이것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해하고 용납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움과 시기의 무거운 돌을 마음 한편에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과 용서가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깨닫고 가정과 직장과 있는 곳에서 사랑과 용서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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