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큐티, 묵상 사도행전 25장 13절에서 27절 말씀을 통해 " 나의 복음과 그들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눕니다.
주신 말씀을 통해 도전과 위로를 받으며 세상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베스도의 고민
벨릭스에 이어 유대지역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베스도는 바울의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재판 과정 가운데, 자신의 문제를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재판을 맡으면서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이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풀어 줄 수도 없었고, 또 명백한 죄목 없이 가이사에게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풀어주지도 못하고 보내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상황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베스도는 이 고민을 자신에게 찾아온 아그립바 왕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사도행전 25:13 /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사도행전 25:14 /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베스도에게 아그립바왕이 찾아오다
13절에 아그립바왕이 베스도에게 찾아옵니다. 여기서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를 말합니다. 아그립바 2세의 아버지는 헤롯 아그립바 1세였습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둔 자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키프로스와 혼인하여 아그립바 2세를 비롯하여 버니게 , 마리암네 그리고 드루실라를 낳았습니다. 두르실라는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의 아내가 된 인물입니다.
아그립바 1세의 자녀 중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가, 베스도를 찾아온 것입니다.
베스도는 자신에게 찾아온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그를 넘겨달라는 이야기 (15절)
그러나, 로마법에 의해 변호할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넘여줄 수 없다는 이야기(16절) 그래서 바울과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이 모여 재판하였으나 바울에게서 어떠한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예수라 하는 이가 죽었는데, 바울은 살아 있다고 주장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전해 줍니다.
총독의 이야기는 들은 아그립바 왕은 자신도 바울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그립바 2세도 예수를 말하고 있는 바울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그립바왕의 요청에 따라 베스도는 그 이튿날 바울을 아그립바왕과 버니게 앞으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 종교지도자와, 벨릭스, 그리고 베도스에 이어, 이제는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이 믿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나의 종교'와 '그들의 종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우리가 눈여겨볼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들의 종교’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5:19 /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벨릭스를 비롯하여 지금 총독인 베스도 역시, 바울을 심문하면서 바울이 전한 예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지금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19절)
사람이 죽는 것은 법칙입니다. 법칙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번 태어나서 언젠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칙을 깨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그 죽음의 법칙을 깨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믿음 안에서 진짜라고 믿는다면, 인류 역사상 이 보다 놀라운 뉴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이 놀라운 뉴스를 바울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부활이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그들의 종교’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이야기는 여전히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놀라운 복음 앞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나의 복음이 되지 못하고, 나와 상관없는 그저 그들의 종교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들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어도, 나의 복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베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복음’ 삼고 힘써 증거 한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고 그 복음을 힘써 증거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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