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전도자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이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스스로는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아니, 감히 하나님을 모욕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가지고 있단 생각이었습니다.
사울의 열심
사울은 유대교에서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 특히, 핍박을 피해 흩어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에 여전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1 /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여기서 ‘살기’는 원어로 '포노스'인데 기본적으로 ‘살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절의 위협과 살기는 “죽이고자 하는 위협”을 말합니다. 사울이 얼마나 과격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사울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얼마나 열심이었고, 또한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는 너무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하나님도 잘 믿고 열심히 섬기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열심은 정말 칭찬받을 만한 것일까요?
계명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이 나옵니다.
1 계명부터. 5 계명까지 우리는 이것을 대신계명이라고 부릅니다. 5 계명부터 10 계명은 사람과 관계된 계명입니다. 이를 대인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줄줄 외우며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 내려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10가지 계명뿐만 아니라, 이 계명을 기본으로 수많은 전통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 계명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알지 못했습니다.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10가지 계명이라는 구체적인 지침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으로 요약해 주셨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롬 13장 10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사역하는 것은 정말 귀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열심은 자기만족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역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고린도전서 13:1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랑이 빠진 기도, 사랑이 빠진 사역, 사랑이 빠진 열심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소리는 큰데, 소음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울의 열심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주님의 열심
반면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입장에서 사울은 원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런 사울에게 먼저 찾아오십니다.
사도행전 9:3 /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이 본 것은 빛이었습니다. 저는 3절을 읽으면서 주님의 따듯함을 느낍니다. ‘빛이 사울을 둘러싼’ 모습이 마치 예수님께서 그를 둘러 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4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주님은 사울을 두 번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예수님은 사울에게 분개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는 다급함과,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특히 4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와 떠 올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모세야 모세야 두 번 부르십니다. (출 3장 4절) 그리고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의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도 사울을 두 번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속에도 사울을 변화시켜 복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열심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 예수님의 열심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주님의 열심.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해 주시며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열심과 주님의 일하심이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열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온전한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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