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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사도행전

매일 큐티 / 사도행전 7장 17절~50절 (교만이 문제입니다)

by Updream 2023. 7. 5.

매일 큐티 오늘은 사도행전 7장 17절~50절을 통해 "교만이 문제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눕니다. 

사도행전 71~50절까지 이르기까지 공회에 선 스데반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긴긴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아브라함과 요셉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면, 17절부터는 모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시작점에 있는 인물이고, 요셉은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인물이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출현을 알리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세 사람은 구약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이 드러내려는 메시지는, 세명의 인물이 무슨 일을 했는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이 세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섭리하셨는지를 성경은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는 어떠한 인물입니까?

 

1.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

그는 본래,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이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후에 장성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5절과 같이, 당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민족을 구원하시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탈로 나서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잊힐 즘 하여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다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려는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는 10가지 재앙이라는 전무후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40년의 광야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2. 광야생활, 하나님에 대한 불신

광야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땅입니다. 이런 곳에서 성인장정만 60만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먹을 음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자,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과연 저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맞나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3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39 /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불신하고, 도리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보여 주었던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그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와 긍휼을, 인간의 계속되는 불신과 죄악을 드러내 줍니다.

 

지금 스데반이 이 구약의 역사를 그들에게 드러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했듯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목이 곧아 하나님을 거스른 것처럼, 지금 이스라엘이 귀의 할례를 받지 못하고 성령을 거스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이스라엘이 무지와 교만으로 모세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지금 이스라엘이 무지와 교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이 자리에서, 그들의 종교적 자만과 잘못된 고정관념을 지적하면서 당신들이 못 박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가장 무서운 적 - 교만

스데반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공회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역사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교만을 깨닫고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가슴을 치지 않고 돌로 스데반을 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구약을 잘 알고, 나는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켜서 나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 그들에게 헬라파 유대인 스데반이 전하는 설교는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잠언 16:18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에 순종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가주님의 말씀이라면, 어린아이에게도 조차 들을 수 있는 겸손이 내게 있는가? 누군가 나의 죄악을 지적하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이 우리에게 있느냐 말입니다. 

교만이 우리의 귀를 막고,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듣는 귀를 구하고,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