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18절 말씀을 통해 "영원함을 바라보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교회를 다니면 잘 되나?
교회를 다니면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진급이라던지 건강이라던지 아니면 경제, 자녀, 등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했으니 교회를 다니면서 삶의 다양한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 교회를 다녀서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정말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으로 잘 풀리지 않고, 잘 안 되는 것도 봅니다. 그러면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지만,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 된다!! 맞는 말이기도 한데, 세상적으로 보면 꼭 맞는 말도 아닐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도 있고, 예수를 잘 믿어도 생활적으로 불편하고 어려운 경우가 많고, 예수를 잘 믿어서 나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낙심이 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사도바울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은 전폭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했고 수많은 전도여행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그의 서신은 신약성경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신자들 중에 상위 0.01%에 속할 정도로 좋은 믿음 그리고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나 훌륭한 신앙을 가진 바울의 삶 속에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얼마나 큰 복을 부어 주셔야 하는 걸까요?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세상적인 성공이나 부나 명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일은 일대로 하였습니다. 이 말인즉. 그는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서신을 읽어 보면 사도로서 대접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일은 일대로 하면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전도하다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간 적도 있고, 생명이 끊어질 위험도 수 없이 경험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고백하는데,, 아마도 바울을 괴롭히는 치명적인 육체적 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신앙이고 복음이고 예수를 포기해도 수 없이 포기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은 옥중에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구원받은 것뿐만 아니라 구원받게 하신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 어려운 중에서도, 감사를, 은혜를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그 비결은 오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린도후서 4:7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절에 이 보배는 바로 앞 절의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알 수 없는 흑암과 공허와 혼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고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7절의 고백과 같이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보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그릇이란 부서지고 연약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서지고 연약한 우리의 육체에 하나님을 아는 은혜를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창세기의 고백과 그 의미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의 본래 존재는 ‘흙’이었습니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티끌이나 먼지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생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생기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신비이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우리의 육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알았던 바울은 질그릇 즉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로운 은혜를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 4:8 /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인정합니다. “나의 몸은 연약합니다. 나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나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소 결론부인 16절에도 잘 나타납니다.
고린도후서 4:16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은 7절, 10절, 11절에서 언급된 것 같이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육체’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육체는 연약하고 부서지기기 쉬우며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6절에는 속사람이 등장합니다. ‘속사람’은 겉사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겉사람과 속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잠깐과 영원의 차이입니다.
겉 사람은 잠시입니다. 아무리 길어도 100세를 잘 넘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영원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4:17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8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은 겉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속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은 세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당장 보이는 겉사람에 더욱 집중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 겉사람은 잠시이고 보이지 않는 것 속사람은 영원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울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 바로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짐 엘리엇이란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영원’이 없으면 ‘잠깐’에 붙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 것에 붙들린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영원함을 누리지 못하고 잠깐에 붙들려 사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보배를 얻은 자들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같이 보이는 잠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함을 누리며 기대하며 주목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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