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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육신의 장막과 하늘의 집)

by Updream 2024. 8. 13.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10절 말씀을 통해 "육신의 장막과 하늘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육신의 장막과 하늘의 집)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육신의 장막과 하늘의 집)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오늘 본문은 장례식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본문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죽음의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지금 당장 떨어져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는 애석한 것이 사실입니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애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무거운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슬픔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소망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이중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데, 그 메시지는 죽음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하늘의 삶은 이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언루처 목사님은 무덤은 끝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입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죽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1절에 보시면 두 가지 집이 나옵니다. 하나는 ‘장막 집’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여기서 장막 집이란, 우리의 육신을 가리킵니다. 출애굽의 유대인들은 장막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막의 가장 큰 특징은 평생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 처소’라는데 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텐트입니다. 텐트는 시간이 지나면 낡아집니다. 그래서 임시 거처이지 영구적인 처소가 되지 못합니다.

 

바울이 육신을 장막 집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임시 처소’이면서, 시간이 지나면 ‘낡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때문에 장막의 특성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반면, 1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나옵니다. 장막집은 땅에 있다면, 영원한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장막집은 언젠가는 무너지지만 하늘의 집은 영원합니다.

 

바울은 이 ‘영원한 집’을, 다른 본문에서는 ‘영광스러운 몸’(고전 15장 43절) ‘신령한 몸’(고전 15:44) ‘썩지 아니할 것’(고전 15장 53절)로도 표현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몸은 무너져 죽음을 경험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날, 그때는 지금의 육신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부활체로 부활하여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5:2 /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늘로부터 그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 즉 예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후서 5:3 /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여기서 벗은 자는 육신의 장막을 벗었으나, 새로운 영원한 하늘의 집을 덧입지 못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교회 올 때 벗은 몸으로 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주기보다도 창피합니다. 그런데 이런 창피는 잠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우리가 거할 처소가 없을 때, 그래서 신령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지 못했을 때는 과연 어떠한 부끄러움이 있을까요?

 

성경은 ‘둘째 사망’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이란 육신의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되는 사망으로서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임하는 최종적인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와 멸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건 부끄러움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바로 ‘절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벗은 몸으로 발견될 수 없고 2절에서와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몸을 입고 여러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주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주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는 도리어 몸을 떠나서 차리라 주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고백했습니다. 빨리 하늘의 옷으로 덧입고 싶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구원과 영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이었고,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라

이러한 믿음과 확신 속에 살았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5:9 /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늘의 영원한 집을 소유한 사람인가? 이 귀한 은혜를 확신하며 소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항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보게 하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로 부활을 소망케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육체가 무너질 때, 온전하고 영원한 하늘의 집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날 동안에 생기는 여러 가지 시험과 문제들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주실 하늘의 집을 소망함으로 오늘도 주 안에 믿음의 복된 하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