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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욥기

욥기 1장 13절~22절 (주신이도 여호와, 거두신이도 여호와)

by Updream 2024. 10. 6.

욥기 1장 13절에서 22절 말씀을 통해 "주신 이도 여호와, 거두신이도 여호와"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욥기 1장 13절~22절 (주신이도 여호와, 거두신이도 여호와)
욥기 1장 13절~22절 (주신이도 여호와, 거두신이도 여호와)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욥은 성경에 등장한 인물 중에서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일 것입니다. 종들을 잃어버립니다. 그 많던 재산도 하루 만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사람은 늘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1000만 원을 갖고 있던 사람이 1000만 원을 잃어버린 것과, 10억을 갖고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10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느끼는 상실감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상실감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욥이 갖고 있던 재산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느낄 상실감을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닥친 재난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생명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재산이야 다시 모으면 된다지만 잃어버린 생명은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욥 앞에 일어났습니다.

 

특히 성경은 16절에 ‘그가 말하는 동안에’ 17절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18절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라고 서술하면서 이러한 엄청난 위기와 고난이 한꺼번에 찾아왔음을 이야기합니다.

 

한 가지 사건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련이 그것도 한꺼번에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욥을 대하기 때문에 사실 욥이 당한 일이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냥 힘들었겠다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내가 욥이라면 어떨까요? 내가 느낄 그 고통과 상실의 슬픔을 생각해 볼 때 상상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욥을 가공의 인물로 보기 합니다. 그가 당한 일이 너무나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욥은 너무나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당한 일보다 이후에 욥이 보인 반응이 더 놀랍습니다. 

욥기 1:20 /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먼저 욥은 일어났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슬픔의 자리에서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찢었습니다.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겉옷을 찢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애통을 표출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머리털을 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상실에 대한 아픔을 표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놀랍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니까 욥이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고 말씀합니다.

 

욥이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하기 위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욥의 반응은 우리가 문제와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고, 시련이 찾아오고, 고난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게 됩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어려움, 나의 문제, 나의 풀리지 않는 이 아픔을 들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나는 아픔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일어나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며 주님을 불렀습니다. 모두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절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 거두신 이도 여호와

이후에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1:21 /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구절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 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런데 이 구절속에 담긴 의미는 잘 모릅니다. 

 

이 짧은 구절속에 여호와가 무려 3번이나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헬로힘'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존성(출 3:14),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신 7:9), 구원자이신 하나님 (출 6:6), 하나님의 임재(출 33:14), 그리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출 34:6-7)으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반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고백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어디에 기초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왜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와 조건은 없습니다. 다른 것을 같다 붙이면 그것은 종교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분을 예배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욥이 그의 인생의 가장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 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고백을 드림과 같이 우리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