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6장 1절에서 22절 말씀을 통해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는 제목으로 주신 은혜 함께 나눕니다.
고난을 주는 위로자
욥의 친구들은 무려 3차례나 돌아가면서 욥에게 말합니다. 들어 보면 대단히 좋은 말 대단히 중요한 말을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욥은 친구들의 이야기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더 괴로워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욥의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욥기 16:1 /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기 16:2 /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엘리바스는 이미 한차례 욥에 대해서 훈계하였습니다. 그리고 15장에서 다시 욥을 향해 훈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바스의 두 번째 권면은 첫 번째 권면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욥이 고난 받는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엘리바스는 자신의 이야기는 특별한 지혜자로부터 들은 지식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친구들의 생각에 욥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내가 많이 들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다”
'재난'과 '위로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아니 어떻게 위로자가 재난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친구들을 향해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 친구들의 수많은 말들이 오히려 욥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헛된 말
그리고 이어 말합니다.
욥기 16:3 /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욥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왜 지속적인 말들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욥기 16:4 /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욥은 친구들처럼 그럴듯한 언변을 늘어놓으면서 고개를 절리 절래 흔들었을 것이다!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나도 너희처럼 말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말합니다.
욥기 16:5 /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너희는 나를 정죄하지만 나는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섭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가 지금은 완치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평소에 물을 잘 안 마셔서 병에 거린 거예요. 운동을 안 해서 그런 거예요. 누구를 미워해서 암에 걸린 거예요.”
가뜩이나, 슬프고 불안한데, 와서 한다는 말이 다 환자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책의 저는 말합니다.
“고난을 당하던 욥에게 정죄했던 친구들이 성경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욥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답답하다고 느낄 수 도 있습니다. 아니 친구가 되어서 어찌 그러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건강이 나빠지지. 그렇게 하면 성공 못해!! 실패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니까 복을 받지 못하는 거야.” 이러한 말들이 오히려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의 말들은 욥을 더 힘들게 하였습니다. 더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려운 처지와 마음을 6절부터 이어서 토로합니다.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16:17 /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욥기 16:18 /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고,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자리를 못하게 하라는 “ 표현은 자신의 억울함과 답답함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전달되기를 바라는 간곡한 표현입니다.
욥기 16:19 /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지금 욥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을 드립니다.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느니라.
‘증인’과 ‘중보자’는 짝을 이루고, ‘하늘에 계시고’와 ‘높은 데 계시니라’가 서로 짝을 이룹니다.
이 문제의 답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아시고 하나님 만이 나의 의로움을 증언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이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중보해 주시는 분이 하늘에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중보자에 대해서 디모데전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2:5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욥이 믿고 구했던 중보자가 누구이십니까?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보혈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중보자에 대해서 디모데전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그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처지를 분명히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의 참된 중보자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늘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복된 하루 보내시길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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